처음으로 설계를 배울 때의 일이다.
과목 이름은 비록 '건축도학-_-' 이었지만, 나름대로 '빛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의 행태 관찰하기' 같은 묵직한 주제를 가지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발표하던, 설계의 출발 단계 수업이었다. 뭐, 그렇다 해도 그때 나는 몹시 어렸다. 나이뿐 아니라 생각에서도. 그런 탓에 설계라기보다는 어설픈 착각에 기초한 손장난에, 발표라기보다는 허접한 결과물에 대한 변명에 더 가까운 수업 시간을 보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수업 기말 과제로, '공대 연못 다시 보기'가 있었다. 말이 공대연못이지, 처음 본 사람은 무슨 합성소재 바닥인가 착각을 할 만큼 녹색 개구리밥이 빽빽하게 수면을 메우고 있는 그 연못은, 쳐다보기도 싫을 만큼 더러웠다. 게다가 연못 위로는 다리가 하나 지나가고 있어서, 그 육중한 교각과 다리상판이 떨구는 그림자가 안 그래도 암울한 그 곳을 더 우울하게 만들고 있었다. 공대 학생들의 주된 동선에서도 푹 꺼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장소도 아니었다....
고로....'현장 관찰' 타이틀을 달고 시작한 첫 발표 시간은 정말이지 암울의 극치라 할 만했다.
- 그런게 있었어요?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어요.
- 기본적으로 물이 너무 더럽던데요. 연못이라 그러기가 좀...
- 자X연하고 너무 비교돼요~
- 저 선생님, 이거 메워버리고 디자인 해도 되겠습니까?
- 저 교각만 없어도 어떻게 될 것 같은데.
- 왜 거기에 연못이 있어야 되는지 모르겠어요. 공대 땅도 좁은데.
- 공대식당이랑 연계해 볼려고 했는데, 솔직히 너무 더러워서 밥맛 떨어질 것 같은데요.
- 접근하기도 힘들구요. 들어오는 계단 입구엔 엄하게 교수주차장 표지판이 가리고 있더라구요. 근데 그거 치워도 솔직히 귀찮아서 안갈거 같아요.
- 벌레 진짜 많아요-_- 물렸어요...
모든 발표는 마치 서로 짜고 하는 듯이, 현황조사 + 문제점 지적 + 문제점 보완방법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저 다른 사람이 발견 못한 문제점 하나 있으면 이거다! 하고 부풀려 떠들기에 바빴다. 우리들의 가차없고 잔인한 말들 속에서, 안 그래도 불쌍했던 공대연못은 이리 맞고 저리 치이면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고 가능성도 없고 문제만 가득한, 더럽고 가기 싫고 음습한 공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롭고 우수한 우리들에 의해 황공스럽게도 치료 수술받아야 할 존재로 낙인찍혀 버렸던 것이다.
쳇,이런 공간을 가지고 어떻게 설계를 하란 말이야?
수업 막바지 교수님의 최종 크리틱만을 남겨 놓고 우리는 모두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 여러분의 발표 잘 들었어요. 뭐 굉장히 흥미로운 걸 발견한 사람도 있었고, 준비가 좀 미흡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 싸이트에 이런 문제점이 있다, 그걸 한번 자기가 나서서 고쳐보겠다, 는 식으로 얘기를 했는데.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자기 태도, 그 관점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은 거 같애.
뭘 대하고 접하든지 간에 일단 그 대상이 뭐가 잘못됐다, 뭐가 틀렸다, 이렇게 비판? 어쨌든 흠잡기부터 시작하면서, 마치 자기 자신은 그 대상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게, 이른바 먹물 좀 먹었다는, 스스로를 엘리트 비슷하게 생각하는 놈들의 공통점인데, 여러분도 역시 그런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좀 개인적으로는, 안타깝네요. 그 점이.
물론 문제점 지적하는 것 좋아. 하지만 여러분이 지적한 것들은 고치면 되는 문제들이야. 물이 더러우면 수질정화 하면 돼. 찾기 힘들면 표지판 세우면 되고, 주차장이 걸리면 차 못 들어오게 하면 된다구. 그게 공대연못의 본질이야? 아니잖아. 그런데도 자꾸 눈에 불 딱 켜고 그런 것만 찾다 보면 그 싸이트의 진짜 모습은 영영 못 보게 되는 거야. 여러분이 제시한 문제 다 고친다고 치자. 그러면 공대연못이 진짜 좋아질까? 좋아질 수 있겠지. 하지만 그래 봤자 공대연못이 가진 본질적인 핸디캡들 - 교각, 다리 상판 같은 거, 설마 이거 없애겠다고 하는 사람은 없겠지, 그런 걸 극복할 수는 없는 거라고. 단점만 찾다 보면 결국은 단점에 묶이게 돼.
근데 공대연못, 여기가 말이야, 되게 재밌는 장소라고. 봐. 지금 공대에 흙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다 건물에 시멘트에 붉은 바닥으로 꽉 차 있고, 나무나 풀은 찾기도 힘들어. 여기는 이 공대에서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녹지야. 게다가 물도 있고. 물론 더럽긴 하지만, 거기 물이 있다는 것 때문에 여러분은 거기까지 내려갔던 거 아냐? 인간에게는 물에 대한 거의 본능적인 호기심이 있다고. 그게 얼마나 큰 재산이야. 게다가 이 땅은 순환도로에 바로 접하고, 공대식당과도 굉장히 가깝고, 한 발자국만 나가면 관악산이 바로 옆이야. 황량해만 보이는 공대 공간을, 관악산이라는 거대한 자연과 묶어줄 수 있는 중요한 장소가 될 수도 있단 말이야. 그리고 여러분이 싫어하는 그 다리, 그거 굉장히 중요한 랜드마크라고. 여러분 택시 타고 들어올 때 뭐라고 해? 35동에 내려달라고 하나? 택시기사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써 있지도 않은데. 그냥 다리 건너서 내려주세요 그러지 않아? 다 알다시피, 랜드마크는 길 찾을 때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 아냐? 랜드마크, 늘 다니는 여러분들에겐 필요 없겠지만, 이곳에 처음 오는 사람들에게 굉장히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공간이 될 수 있다고.
....앞으로 여러분이 어떤 큰 프로젝을 맡아서 어떤 설계를 하든, 싸이트 조사는 분명히 하게 될 거야. 그거야 기본 단계니까. 그런데, 그 싸이트 조사 할 때 절대 문제점부터 찾아내려고 들지 마. 그렇게 해서 설계 해 봐야 이거다 싶은 거 절대 나오지 않아. 기껏 나와봤자, 반창고 덕지덕지 붙인 건축밖에 더 되겠어. 앞으로는 어떤 사이트를 보던지, 그 싸이트의 문제점에는 일단 눈을 감고, 거기가 어떤 '장소'인지,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그 가능성을 어떻게 살릴 수 있을지를 생각하도록 하세요. 그러면 여러분이 정말 상상하지도 못했던 결과가,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오게 될 겁니다.
무엇을 하든, 가능성을 먼저 보는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상.
그 교수님에겐, 그냥 늘 하던 얘기, 머리만 큰 바보 1학년들에게 일상적으로 던졌던 말이겠지만, 말 그대로 머리만 큰 바보 1학년이었던 내게 그 이야기는 충격이었다. 왜 나는 거기서, 똑같은 장소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가. 왜, 아직 닥치지도 않은 문제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아니면 시니컬하게, 폼나게 한번 픽 웃어주고 그 자리를 떠났던가. 왜 나는 약하게 흔들리는 촛불들을 그냥 밟아 버린 채, 이거 어두워서 뭐 해먹겠냐고 불평하며 돌아왔던가. 왜, 기다림의 망원경을 들어야 할 곳에서, 추호의 망설임 없이 메스부터 들이댔던가?...
그 얘기 들은 지 어느덧 2년이 흘렀다. 아무리 봐도, 여전히 나는 제자리걸음이다. 하지만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좀은, 의식적으로라도, 만나는 모든 것과 지내는 모든 시간에,
작으나마 꿈을 걸어보려 한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관점.
세계를 죽이고 살릴 수 있는, 막강한 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