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우선 읽기 전에... 위의 제목은 오타가 아닙니다. 다만 사투리일 뿐입니다.
'175의 대화'라는 제목은 글 처음 부분만 읽어보셔도 곧바로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그냥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있어 대충 소설 비스무리하게 끄적여 봅니다.
질럿, 저글링, 마린이 모닥불 가에 둘러앉아 있었다. 행성 온겜과 행성 엠겜에 걸쳐 세 종족간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매일같이 수많은 생명이 사라지는 요즈음, 그야말로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해병대대 3중대 2소대 소속의 마린 상병은 한숨을 내쉬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마침 지구와 비슷한 대기 상태를 가진 곳이었기에 담배를 피운다는 사치를 누릴 수 있다. 불을 붙이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천천히 내뱉자, 옆에 앉아 있던 질럿이 인상을 찌푸렸다.
"유독물질 같군. 인간이란 종족은 그런 걸 마시고 사나?"
난생 처음 듣는 금연권고 문구로군. 마린은 말없이 담배를 한번 더 빨아들였다. 붉은 불꽃이 천천히 타들어가고, 마린은 잠시 후 담배를 집어던졌다.
"이봐 인간. 뭣 때문에 탈영병이 된 거냐?"
"사돈 남 말 하시네. 이봐, 미스터 저그. 도망자 신세인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흥, 잔소리는. 그야 저 고귀하신 종족 분께서도 쌈박질이 무섭다고 울며 도망치는 마당인데, 나 같은 거야 뭐 쫄랑쫄랑 살 길을 찾는 것 뿐이라구."
은근슬쩍 질럿을 곁눈질하는 저글링의 모습에 마린은 흘끗 질럿의 눈치를 보았다. 하늘을 찌를 듯한 키에 자신의 허벅지만한 크기의 칼 두 자루를 휘두르는 질럿에게, 겁도 없이 조그만 저글링 따위가 저런 말을 해 대다니.
하지만 질럿은 그런 말을 듣고도 별반 반응이 없었다. 한참의 침묵이 흐르고, 이윽고 질럿의 굵직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죽음이 무서운 건 아니었다. 내가 우리 종족을 배반한 건 환멸감 때문이다."
"헤헹, 그러셔? 흰소리야 누구나 못하나."
순간 번뜩이는 질럿의 눈빛에, 오히려 마린이 움찔했다. 이러다 같은 탈영병들 사이에 피 튈라. 당장이라도 칼을 들이밀 것 같은 질럿에게, 마린은 황급이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보지?"
질럿은 몸을 돌렸다. 흡사 나무 한 그루가 옆으로 돌아서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으로 질럿은 한동안 마린을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떨구고 모닥불 속에 장작을 집어던졌다.
"......우리 부대의 대장이 나와 내 친구, 두 명에게 명령했다. 온겜 행성 서반전투구 A33-F02 지역, 통칭 [로템9입구]라는 곳으로 돌격하라고."
"그곳은....!!"
"......알고 있나?"
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 며칠 전, 우리쪽 부대가 진출한 곳이지. 다량의 지뢰를 매설한 후, 미사일 발사대를 상당수 건설하고 제 3 전투기갑사단이 진을 쳤다고 들었어. 우리 쪽에서 가장 강력한 전차부대가 소속된 사단이지."
"역시 잘 알고 있군. 나도 정찰갔던 옵저버를 통해 그곳의 정보를 들었다. 엄청난 양의 지뢰가 매설되어 있다 하더군. 그 뒤에는 그 전차인가 하는 것들이 땅에 다리를 박고 죽 진을 쳤고."
"응. 그렇다면....아!"
질럿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눈치챈 모양이군. 사령관이 나와 친구에게 명령했다. 아이우를 위해, 지뢰밭으로 돌격해 폭사하면서 지뢰를 제거하라고."
"그런...!"
"언제나 아이우를 위해, 사령관을 위해...!! 사령관이 언제나 많은 전투에서 승리해 왔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언제나 이런 식이다! 드라군 부대의 지원사격으로 제거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이유로, 발빠른 우리들에게 지뢰을 달려 지뢰를 제거하라 명령하지. 우리는 일개 병사일 뿐이란 거다. 우리의 목숨 따위는... 지뢰밭에서 산화해 형체조차 남지 않아도 아무 상관 없다는 거다. 아이우를 위해선 말이다...."
마린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을 때, 갑자기 저글링이 끼어들었다. 아까와는 정반대로 진지한 표정이었다...... 저그 종족의 표정을 알아보기란 힘들지만 말이다.
"젠장, 고상한 척 하는 니놈들도 우리랑 다를 거 하나도 없구만? 아따 씨X, 우리 대장인가 농장인가 하는 놈은 날더러 저 인간들 기지 앞에 가서 죽치고 앉아 있으라 하더라! 망할, 인간들이 총이랑 불 내뿜는 기계랑 들고 뛰어나올 게 뻔한 곳에 말야! 그리곤 뭐라는 줄 알아? 무슨 정보전이 어쩌구저쩌구, 병력 진출 시간이 어쩌구저쩌구, 그러면서 나보고 뒈져 버리래! 그래서 그냥 토껴 버렸지 뭐! 야, 거기 칼잡이. 너도 잘했다 잘했어. 개죽음해서 뭐 하냐?"
"......"
저글링의 열변에, 질럿은 고개를 들었다.
"그래... 사실 내 친구는 명령에 따랐다. 내가 같이 도망치자고 했지만 거부하더군. 그리고 지뢰밭을 향해 돌격했다...... 개죽음이었지. 지뢰가 폭발하자, 온 몸이 박살나 연기가 되어 버리더군. 나더러 비겁하다 해도 좋다. 하지만 난 죽고 싶지 않았어."
"쳇, 윗대가리란 것들은 언제나 그렇지! 맨날 자기는 위험하지 않은 곳에 앉아서, 남들은 죽을 곳으로 밀어넣거든! 뭐 때문에 그런 놈들에게 목숨을 바치냐?"
모닥불의 열기 이상으로 뜨거운 기운이 흘렀다. 저글링은 계속해서 뭔가 알아듣기 힘든 욕을 중얼거렸고, 질럿은 분노에 찬 나지막한 저주의 말을 내뱉곤 했다. 그러다 문득, 저글링이 마린을 쳐다보았다.
"이봐, 인간. 너는 뭣 때문에 부대에서 도망쳤지?"
"나 말인가?"
담배를 세 대째 피우고 있던 마린이 대답했다. 그는 가만히 하늘을 쳐다보다, 천천히 담배를 눌러 껐다. 그리고 잠시의 침묵 후, 입을 열었다.
"벙커라고, 혹시 아나? 나 같은 잡병들이 들어가서 총을 쏴제끼는 건물이지."
"알아. 그 둥글넙적한 거 말이지? 거 딴딴하던데."
"그래...... 튼튼하지. 외부에서 안을 들여다보기도 힘들고."
마린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메딕... 알지?"
이번엔 질럿이 대답했다.
"하얀 옷을 입은 여성 인간 말인가? 너희들을 치료해 주는 거 같더군."
"그래. 아름다운 아가씨들이지."
마린은 피식 웃었다.
"난 말이야, 이틀 전 전방 벙커에서 야간근무를 섰지. 주위는 한적하고, 아군 건물이라곤 보병 지원막사 하나가 전부였어. 그런데 말이야, 막사 안에 그 메딕이 있었지."
"그래서?"
"뭐, 바깥은 춥잖냐. 그래서 메딕을 불렀지. 이 안에 들어오라고. 그런데 벙커 안은 덥거들랑. 그래서 옷을 벗었지 뭐."
"엥?"
질럿이 눈썹을 치켜뜨거나 말거나, 마린은 유유자적히 말을 이었다.
"아 그런데 막 일을 벌이는 와중에, 순찰 나온 우리 소대장이 그걸 본 거야! 아 씨, 대체 장교가 벙커 따위를 왜 들여다보는 거야! 덕분에 딱 걸려 버렸잖아! 막 눈썹 치켜뜨면서 그러는 거 있지. 둘 다 내일부로 영창에서 썩을 각오 하라고. 그래서 그날 밤에, 막사로 복귀 안 하고 눈썹날리게 튀었지 뭐. 그렇게 된 거야. 어? 왜? 왜들 그래? 어어? 이, 이봐, 이봐? 어이어이......"
모닥불이 따뜻하게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