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글 쓰네요. 야구에 대한 지극히 감상적인 글입니다.
인터넷이 가능했다면 아마 2년 전에 썼을 글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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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김병현 선수와 아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판타지를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
김병현 선수의 분투와 영광, 눈물과 좌절 그리고 마지막의 믿지 못할 역전극까지.
당시 어찌저찌 카나다 반쿠버에 장기체류 중이던 저는,
유학중이었던 친구 부부의 원룸에서, 북극 가까운 카나디안로키의 어느 허름한 인에서,
하키 경기에 열광하는 백인들 틈에 끼어 눈치보며 스포츠빠에서..
뭐 이런저런 곳에서 포스트씨즌을 보았더랬습니다.
그 동네에선 쉽지 않은 일이었죠.
카디날스와의 NLDS 3차전, 5:3으로 앞서던 8회 2사만루에서 따낸 포스트씨즌 첫 세이브,
아틀란타와의 NLCS, 8회 7:3 무사만루에 등판해서, 위기를 한 점으로 막고 얻어낸 참피온씨리즈 첫 세이브와
또 다음날 3:2에서 죤슨옹을 구원해 또 2이닝을 막아낸 역사적인 순간을 볼 수 있었던 것,
제 삶에서 몇 안되는 커다란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운명의 4,5차전,
마운드에 쪼그려앉은 김병현 선수의 모습을 울면서, 귀를 막고 바라보는 제게
친구는 "80마일로 내쳐 서른몇시간만 달리면 Bank One 볼팍까지 가지.
들어가지는 못해도 가서 밖에서 응원이라도 할까?"라며 위로해줬고
제수씨는 말없이 아껴둔 진로팩소주를 꺼내더군요.
기뻐 날뛰는, 지독히 적대적인 수만관중의 눈길, 그리고 티브이로 지켜보는 수천만의 눈동자
그리고 결과를 알고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억의 야구팬의 시선을 오로지 혼자 받으며
외로이 거기 쪼그려 있던 김병현 선수.
갓 스물 셋 왜소한 동양 청년으로서는 결코 감내하기 힘든 악몽이었을 것입니다.
티비로 보는 제 마음이 이렇게 터질 것 같았는데......
하지만 그는 보란듯이 그걸 견뎌냈고, 이제 다시 포스트씨즌 마운드에 서 있습니다.
그제,
아웃카운트 둘을 잡아놓고 있는,
백인 미디어가 확대재생산하는 '포스트시즌 망령'이라는 허상을 향해
이제껏 꼭꼭 감춰뒀던 강한 스터프들을 꽂아넣고 있는 김병현 선수 앞에
양 손 뒷주머니에 꽂아넣고 나오는, 한량스러운 감독을 보며 솔직히 엄청난 분노를 느꼈습니다.
'왼손엔 왼손'이라는 야구판의 오랜 도그마를 신봉하는 감독을 십분 이해한다 해도,
김병현 선수가 아리조나 시절처럼 꾸준히 '뭔가 보여준' 그런 처지는 아니었다 해도,
포스트씨즌 전체를 이기고 싶다면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마무리를 믿어야 한다는 원칙도
이 경기만은 '죽도록 이기고 싶다'는 욕망 앞에서 무력해질 수 있다는 하해와 같은 이해심을 발휘한다 해도,
병현이 친구 두라조가 직구엔 엄청 강하지만 변화구에 약해서 아리조나에서 내쳐졌다는 것,
한국의 김병현 선수 팬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기본 정보이고
엠브리가 직구 밖에는 던질 줄 모르는 투수라는 것은 자기가 제일 잘 아는 터일텐데
저런 이해할 수 없는 투수교체를 하는 감독을 좋게 볼 수는 없었습니다.
어느 야구게시판에 누군가가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감독의 선택을 옹호하는 글을 올려놓았더군요.
전체의 논지는 정당하고, 충분히 가능한 시각으로 보였습니다.
냄비긴 하지만 저도 야구팬 노릇 어언 이십년이 넘었으니까요.
하지만 댓글로 달린 또 다른 유저의 짧은 항변에도 무척 공감했답니다.
"시집간 딸이 평소 한숨과 눈물짓는 모습을 보고 마음 아파하다가 시댁의 횡포와 만행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을 때...
당신 딸이 평소에 잘 했더라면 시댁의 구박이 있었겠는가 라는 말은 지금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오히려 그런 말을 하는 인간이 훨씬 밉게 느껴집니다"
텍쓰트에서 역사를 제거하면, 역사에서 당시 인민들의 감정을 제거하면 뭐가 남을 것이며
통계에서 상황을 제거하면, 상황에서 사람을 제거하면 대체 뭐가 남을 것인지 궁금했던 순간이었습니다.
'믿음'의 의미와 그 한계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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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야구팬이고, 송진우와 박찬호, 김병현, 란디 죤슨과 본즈를 좋아라 합니다.
원년 삼미의(요새 희한하게 재조명되더군요), 창단 이후 지금껏 빙그레(한화)의, 옛 FC 다져스와 옛 아리조나의,
그리고 오늘은 보스톤 레드삭스의 엄청난 냄비팬이구요.
제 차 씨트 카바는 아리조나 져지이고, 오늘 입고 있는 옷은 빨간양말 원정 져지랍니다.
담배사러 갈 때는 LA도 선명한 연하늘색 모자를 쓰고 다니구요.
모자 쓰고 빨간 저지 입고 운전할 때면 무슨 생각 하는 지 아시나요?
김병현 선수가 '우승 청부사'로 여기저기 불려다니게 되는 날엔
저지 점퍼 모자 합쳐서 스무 팀 꺼는 될 판이네, 하면서 피식 웃습니다. 61, 49, 51......
또 저는 게임광이고, 기욤 선수의 오랜 팬이자 홍진호/임요환 선수의 팬이기도 합니다.
오바버닝 뻑 잘나는 모 벌크 CD를, 임요환 선수 싸인이 있다는 이유로 수백개씩 사서 후회하기도 했고
아들넘이 TV를 넘어뜨리며 PS2와 DVDP까지 세트로 망가뜨린 정을 알면서도(거의 2001년 월드시리즈급 충격^^)
모 게이머의 DVD를 충동예약구매 하기도 했고, 오늘은 어제 주문한 짙은 회색 히드라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참. 긴 팔 라운드 셔츠였으면 좋았을 텐데.
올해 또 딸을 낳아, 이제 먹여살릴 식구가 셋으로 늘어난 터,
가끔 쇼핑몰로 향하는 마우스를 자제하려고 애를 쓰지만, 제 하루/한 주, 한 해의 사는 맛을 주는 그를 위해
이거 하나라도 사 준다면,
그런 사람들이 몇 천, 몇 만만 된다면 그를 아주 조금이나마 응원하는 길일 수 있겠기에
가끔 현대택배나 한진택배, 톰 행크스가 보내주는 FedEx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저도 가끔 열기에 차서,
툭 튀어나온 관중의 야유에 흔들려서 게임을 망쳤으니 홈구장 바꾸라는 호통,
잔디 사정 때문에, 불규칙바운드에, 뭐 이상한 게 길을 막는 바람에 경기가 망가졌으니 구장 관리 좀 제대로 해라는 짜증,
난 너의 팬인데 대체 훈련을 하긴 한 거냐, 내 채찍을 받고 다음부턴 좀 경기 잘 해봐라는 특이한 격려... 등등
해 본 적도 있고, 지금도 가끔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꾹 참고 그냥 '맹목적'으로 응원의 글과 위로의 글을 쓰는 게,
삶과 꿈을 걸고 저기서 분투하는 우리의 영웅들을 돕는 길이 아닐까, 생각하며 참습니다.
그리고 냉정하고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날카롭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요새는 참 많기 때문에
안목도 없는 나까지 숟가락 걸칠 필요는 없을 테구요.
그냥 없는 돈이나마 소소하게 '현질'로, 나쁜 팬 노릇, 계속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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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김병현 선수의 승리와 임요환 선수의 선전을 빌고,
멋진 경기 보여준 홍진호 선수에게 심심한 위로 말씀 드립니다.
멋진 GG였습니다. 멋진 GG. 역시 홍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