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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3/08/05 00:57:15 |
Name |
항즐이 |
Subject |
[여름인사] 다녀왔습니다. |
대학원생이 되어서, 별반 달라질 것도 없다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방학이 사라진 여름은 꽤나 무겁게 다가와 버리고 말았습
니다. 애써 걸음을 돌린 것도 아닌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부모님은 얼굴 한번 보기가 몇 달을 기다리는 행사가 되어버리
고 송구스럽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휴가를 내셨다고 해서 보길도를 다녀왔습니다. 모기 하나 없이 시원하고 조용한 섬은 고산 선생님께서 멀리 탐라로
지나치던 물길을 멈추어 생을 얽어 매고 업을 닦으실 만한 곳이더군요.
차를 배에 태워 들어간 섬에서, 먼 타향 사람의 예약을 늦은 시간까지 믿어주시고 기다려 주신 할아버님이 계신 예쁜 기와집
에서 민박으로 밤을 맞았습니다. 제 기억의 한 두 줄 즈음을 그려 놓는 주왕산의 초가집이 생각나, 마치 장작을 쪼개던 아버
지의 모습을 다시 보려 잠을 청하는 기분으로 꽤나 흐뭇했던 듯 합니다.
섬에서 나오는 길에 들른 낙안읍성과 선암사에서는 중학 시절 까까머리 소년의 기분이 되어버렸나 봅니다. 문경 근역은 온통
산과 한적한 내천이 감싸는 작은 길들과 산들의 사이로 이어진 마을들. 그 구석구석 맑은 물 한모금, 시원한 바람들, 철마다
오는 새로운 나뭇잎들의 인사를 맞으러 하루를 걸러, 이틀을 걸러 즐거운 그리고 가벼운 여행을 떠나곤 했습니다. 지금보다
작았던 차 뒷자리에서 어머님이 좋아하시던 포크송을 어느새 따라 흥얼거리며 자꾸만 앞자리로 고개를 내밀어 이런 저런 이
야기를 재촉하던 아이는, 해가 갈수록 부러운 존재가 되어가는 군요. 낙안읍성의 성곽을 걸으며 부모님이 들려주시는 띄엄띄
엄한 옛 가옥의 일상들과 자연과 성의 모습을 귀기울여 들으며 차츰 대꾸보다는 듣는 것만이 더 즐거운 스스로를 발견하고
말았습니다.
조용한 선암사로 가는 길은 너무 멀어 표지판을 믿었던 어머니는 애꿏은 표지판에 엉터리라고 자꾸 투정을 부리시고는, 경내
로 접어드는 숲속 나무 그늘이 끝도 없이 아늑하기만 한데, 길어 다리가 아프시다고 또 엄살을 부리십니다. 하하 웃으면서
접어든 선문 너머에는 마침 스님들이 고요한 의식을 치르시던 중이었습니다. 어느 새 전국의 명찰을 다 둘러보신 부모님이시
지만 의식은 처음 보신다며 저처럼 숨죽이셨는데, 북소리가 잦아들고 다시 울리더니 목어를 힘차게 두드리는 젊은 스님의 얼
굴에서는 패기마저 엿보였습니다. 마침내 커다란 종 소리가 경내를 크게 울리고, 울려대고, 어른이실 분들의 법문 낭독이 은
은하게만, 또는 어머님 말씀 처럼 시원하고 남성스럽게 튼튼하게 걸음을 옮기는 가족의 마음을 채워 주었습니다.
그 길다던 길을 어머니는 조금은 웃으면서 내려 오셨습니다. 아버지는 계획없이 데리고 나선 가족들에게 좋은 여행을 쥐어
주셨는지 힘든 땀을 연신 닦으시며 지친 표정으로 농담을 줄인 모습이셨고, 저는 여전히 여남은 해 전의 모습이 되어 아무
생각없이 숲의 공기만 들여내어 도시의 나이를 하나 둘 먹어버린 폐를 씻어내느라 즐거웠습니다.
다시 먼 길을 지나 집으로 돌아와서, 그리운 pgr을 눌러보기도 전에 수학 책을 잠시 펴고는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무엇을 그
리 자꾸 챙겨주시는지, 매번 늘어나는 짐에 힘겨운 서울길은 학교로 향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돌아와 인사드립니다. 학교에서 잠시 급한 마음에 글을 올렸지만, 오히려 순서가 어긋난 듯 해서 오랜만에 자유게시판
에 용기를 내어 봅니다.
pgr에 돌아오면 그럴 것이라 생각했던 분들이 늘 그렇게 있어 주시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마치 부모님처럼, 그리고 제 유년
시절의 기억들처럼.
저 없는 동안 혼자 게시물의 폭염을 고스란히 받으셨을 homy님께 감사하고 또 죄송하기도 합니다. 이제나 저제나 바쁘신 우
리 canoppy형과 pgr어르신들에게도 조금 더 시간이 있었으면 하고 늘 기원하고 있습니다.
강민 군이 왜 나타나지 않느냐고 툴툴거리며 전하던 안부의 종착지, 날다 군은 건강히 잘 있는지 유난히 더워오는 날씨가 좀
밉상입니다. 언제나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인양 스스로를 매번 채찍질하시며 하루하루를 채워가시는 Apatheia누님은
정말이지 건강마저 걱정입니다.
p.p님, p.p님 생각을 할 때마다 그리웠던 부모님을 속 시원히 뵙고 왔습니다. 이제 시원한 곳에서 p.p님의 넉넉한 미소를 다
시 한번 뵙고 싶은 심정입니다.
글을 남기시지는 않을지라도 늘 들러주실 드렌도누님의 바쁜 일과와 그보다 더한 "그 분"에 대한 사랑도 여전 하실지 궁금하
구요.
오라는 곳도, 가야할 곳도, 또 그 외의 일들도 많기만 한 KPGA장팀장님의 수첩에도 제 이름으로 된 약속 하나 넣어드려야 겠
다는 욕심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리고 많은 분들... 죄송하기만 하네요. ^^
pgr에 들어와서, 게임으로 이루어진 애정들을 만나면서, 늘 그러하면서 또 그리워지는 마음이 갈수록 절실해지기만 합니다.
짧지만 흐뭇했던 휴가를 마치고, 이제 정말 인사를 드립니다. 더 흐뭇한 사람이, 게임매니아가, pgr식구가 되기를 바라면서
요.
잘 다녀왔다고 반겨주시면 좋겠습니다. 먼 길도, 힘든 길도 아니었지만요. ^^ 때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에 부담없이
서로 좋은 말들로만도 애정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있는 법이라 믿고 싶기 때문입니다.
네,
다녀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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