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그런 의심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마 국민학교(제가 졸업한 다음해부터 초등학교로 바뀌었지요) 2학년인가 3학년 때, <인체의 신비>비슷한 제목의 책에서, 사람의 눈은 안구가 마르지 않도록 보호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항상 뜨고 있을 수 없고 다소의 주기로 눈을 깜박거려야만 한다는 것을 읽었지요. 그 후로 저는 이런 의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눈알을 적시기 위해 잠깐 눈을 감았다 뜨는 그 시간.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감지 않으려고 해도, 눈물이 나와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아야만 하는 그 짧은 순간... 내 주위의 모든 물건이 순식간에 무서운 모양 - 그들의 원래 모습인 악마 - 으로 변했다가, 내가 눈을 뜨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와 똑같은 모양으로 돌아와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어린 마음에, 여기저기 귀신 책에서 보았던 중국의 요괴, 일본의 요괴들 모양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눈을 감는 순간, 마치 교묘하게 깎은 굴절 거울로 보는 것처럼 주변의 모든 물건들이 흉측하게 뒤틀리면서 숨기고 있던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고, 흐흐흐 기분나쁜 웃음을 짓는 것이나 아닐까... 그러다가 내가 눈을 뜨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혀를 날름거리던 뱀은 시계 바늘로, 투명 괴물은 벽거울로, 진흙탕의 급류는 낡은 마루로, 사람을 잡아먹는 무서운 식물은 마당의 채송화로, 식인 피라니어는 어항 속 아빠가 잡아오신 민물고기로 둔갑하는 건 아닐까....
저는 눈을 꽉 감고 있다가 갑자기 뜨면, 황급히 둔갑하려다 미처 본색을 감추지 못한 뱀, 피라니어, 식인 식물, 혹은 <마물>의 꼬리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몇 번이고 그런 짓을 했었지요. 하지만 놈들의 둔갑 실력이 워낙에 뛰어나서인지 한 번도 잡지는 못했답니다. 그때부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세계가 동원되어서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세상 모든 것이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심리 검사에 나온 문항이었습니다. 저는 '그렇다'에 동그라미를 쳤습니다. 변덕스러움을 검사하기 위해서인지 똑같은 문항이 여러 번 나오더군요. 저는 계속 동그라미를 쳤습니다.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
그렇게 저는 자라서 고등학생이 되었고 <매트릭스>를 보게 되었습니다. 한도를 모르는 인간의 욕망 속에서 피폐해진 지구. 이제 지구의 주인은 기계입니다. 인간들은 마치 플랜테이션 농장의 작물처럼 <재배>되고 있고, 그들이 <세계>라고 믿고 있는 것은 - 붉고 요염한 꽃잎, 방금 베어물은 사과에서 터져나온 향긋한 과즙.... - 몸 없는 숫자들이 실체 없는 논리에 의거해 구성되어 있는 <시스템>에 불과했지요. 그들의 <세계>는 가짜였습니다.
얼마 후에 학교 도서관에서 <링> 3권을 빌렸습니다. (정확하게 몇 권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링에 0권도 있었지요? 그거였던 것 같기도 하구요.)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황량한 사막, 사람은 커녕 생명체의 흔적마저 끊어진 사막 깊숙한 곳에 비밀 연구소가 있습니다. 최첨단 과학과 탁월한 두뇌가 집약되어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실험하는 것은 시시한 사실 하나하나가 아닙니다. 과학자들은 개별 사실 하나하나 뿐만 아니라, 수많은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면서 나타나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 세계를 실험하고 있었습니다.
주인공이 지금까지 현실이라고 믿었던 것은, 실은 현실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탄생도, 사랑도, 방황도, 숫자에 불과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 감정, 영혼의 마지막 한 요소까지도 변수로 만들어 프로그램화한, 극도로 정밀한..... 그들의 컴퓨터 시뮬레이션이었던 것입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 혁명>에서, 개미 혁명 주동 그룹의 일원인 프로그래머 프랑신은 학교의 컴퓨터 안에 하나의 사회를 만듭니다. 그녀는 그 사회를 창조하고 - 프로그래밍 코드로 - 그 사회의 자비로운 <여신>으로서, 그 <피조물>들에게 거의 완전한 자유를 허락합니다. (마치 우리의 신이 그랬듯이.) 컴퓨터 속에서 그녀의 <자식들>이 자라납니다. 원시 시대를 거쳐, 깬 돌과 간 돌, 청동과 철기, 농업이 발달하고 사유재산이 생기고 싸움과 계급과 부조리가 태어납니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그들의 <여신>과 거의 비슷한 시대에까지 발전해 갑니다. 이 가상의 세계는 혁명 지도부에게 있어서 소중한 자금원이었습니다. 이 세계는 더없이 좋은 실험 대상이었기 때문에, 샴푸 회사, 비누 회사, 식품 회사, 가전 제품 회사, <실제 세계>의 기업들은 너도나도 이 세계에 자기 제품을 실험해 보기 위해 혁명 지도부를 지원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랑신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합니다. 주민들의 움직임이, 그들 속에서 느껴지는 공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안 그래도 얼마 전부터 주민들 사이에서 <여신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해방하자>는 수상쩍은 움직임이 일고 있었습니다. 프랑신은 그녀의 세계를 샅샅이 검색해 봅니다. 아니나다를까, 프랑신이 그들 사이에 내려보낸 <사도>들의 시체가 곳곳에 높이 매달려 있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란 프랑신이 컴퓨터를 조작하려는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모니터가 깨져 버리고 맙니다. 깨진 파편이 프랑신의 얼굴에 상처를 남깁니다. 프로그램 속의 그들이, 현실의 그녀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이지요.
아주 오랜만에 트로피코를 해 보았습니다(아주 오래 전에, 이 게시판에 소개를 잠깐 했던 적이 있지요). 여전히, 임금 수준이며 교사 수급 상황, 범죄 현황, 수확량, 일꾼들의 숙련도, 수출과 관광 수익 현황....이곳저곳을 챙기느라 바쁜 와중에도, 문득문득 목 뒤가 서늘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한 사람을 클릭해 봅니다. 꽤 정교한 디테일까지 표현되어 있는 그녀는 농부입니다. 스페인 계임이 분명해 보이는 이름. 태어난 곳은 마드리드, 나이는 쉰 두 살, 용기와 리더쉽은 보통이고, 지성은 훌륭합니다. (저에 대한) 존경심은 평균치를 밑돕니다. 아니나 다를까, 대학 출신이군요. 자기 직장에 만족하지 못하는가 봅니다. Job Quality. 똑같은 봉급을 받는 다른 농부에 비해 현저히 낮습니다. 하층민들이 사는 고밀도 집합주택에 삽니다. 배고픔은 별로 느끼지 못하네요. 종교심... 생각보다 낮아서 확인해 보니, 외국에서 불러온 성당 신부가 사라지고 없군요. 유희에 대한 욕구, 의료 및 위생 욕구, 범죄로부터 안전하다고 느끼는 정도. 모두 고만고만합니다. 전체적인 행복도. content. 그럭저럭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정도입니다. 남편 역시 농부입니다. 남편과의 사이에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 둘 중 하나는 건설 사무소에서 일하고 하나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딸은 대학을 나와 발전소 직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의 모습도 그래픽으로 나타나고, 하나 하나를 클릭하면 곧바로 그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방금까지 이야기한 것만큼 자세한 프로필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거의 이야기를 하나 만들 수 있을 만큼 풍부한 <개성>을 가진 <사람>들. 자....그런 <가상의 사람>들이 이미 3백 명을 넘고 있습니다. 이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상호작용의 수는 과연 얼마나 될까요.
이것은 팝탑이라는 미국의 한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상업적 용도로 만든 게임입니다. 미국에서는 꽤 성공한 편이어서, 확장팩에 후속작까지 등장했습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 이것이 군대에서 개발되었다면, 그것도 극비리에, 정말 진지한 의도를 가지고, 가능한 한 최대의 예산과 시간과 노력과 첨단의 재능을 쏟아부어서 - 개발되었다면 하는 생각 말입니다. 어쩌면 저의 옛날부터의 생각, 매트릭스나 개미혁명이나 링에서 그리고 있는 세계상은,
환상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지요. ^^
천재적인 사령관들이 벌이는, 이 가상의 전쟁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도중에도 문득 그런 생각이 나곤 합니다. 그럴 때면, 메딕 자리에, 혹은 저글링의 자리에, 혹은 프로브의 자리에 저를 가져다 놓고 생각을 하게 되죠. 왜 이 숱하게 많은 전쟁들은, 늘 몇몇 비슷한 지형에서만 치러지는 것일까. 왜 아직 아군도 남아 있고 적군도 남아 있는데, 갑자기 전쟁이 끝났다는 신호와 함께 모든 것이 암흑 속으로 사라지는 것일까. 왜 우리는 늘 보던 사령관들만 보는 것일까. 아니, 그 모든 질문들에 앞서서, 우리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는 것일까?
깊은 밤, 괜히 싱숭생숭해져 써내려가다 보니 꽤 긴 글이 되어 버렸군요.
여기까지 읽어 주신 분들 감사합니다.